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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칸센 대폭파(新幹線大爆破)'는 '사토 준야(佐藤純彌)' 감독의 1975년작으로 일본 국민배우 '타카쿠라 켄'을 비롯해 '치바 신이치', '우츠이 켄' 등 초호화 캐스팅이 돋보이는 영화로 도쿄역을 출발한 '히카리 109호'에 폭탄을 설치했으며

 

 

 

 

주행속도 80km 이하로 내려가면 폭발한다는 협박 전화가 오고 거액의 몸값을 요구하면서 경찰이 범인들을 쫒는다는 스토리로 이 영화는 향후 많은 기차 납치 영화의 표본으로 자리잡으며 특히 1994년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개봉작 '스피드'에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주인공인 범인 역에 '타카쿠라 켄'이 합류하면서 범인의 분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제작비도 크게 늘어 당시 '토에이' 영화사 사상 최대 규모인 5억3천만엔이 투입된 초호화 블록버스터 오락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영화의 주 무대가 신칸센이라 제작사측은 국철의 협조를 받아 제작하고자 했으나 국철은 이미지 하락을 우려해 영화 제목을 바꾸면 협조하겠다고 했으나 토에이 측은 영화 제목 변경을 하지 않아 국철의 협조를 받지 못하고 신칸센 장면은 미니어처와 몰래 촬영으로 영화를 완성 했습니다.

 

 

 

 

협조를 받지 못하고 몰래 촬영이 많았고 제작 스케줄도 빠듯해 영화 개봉 이틀전에 영화가 완성되 시사회는 개최하지 못했으며, 영화 제목 탓에 신문, TV광고 등이 막혀 홍보 부족으로 개봉당시 흥행은 매우 저조했으나 프랑스에서는 빠른 전개를 위한 102분 편집판으로 8주간 롱런을 기록하며 대히트를 기록합니다.

 

 

 

 

- 제목 : 신칸센 대폭파 (新幹線大爆破)

- 감독 : 사토 준야 (佐藤純彌)

- 배급 : 토에이 (東映)

- 상영시간 : 152분

- 개봉 일 : 1975.07.05일

 

- 출연

  - 타카쿠라 켄 (高倉健)

  - 치바 신이치 (千葉真一)

  - 우츠이 켄 (宇津井健)

 

 

 

 

일본이 자랑하는 고속열차 신칸센에 약 1,500명의 승캑을 태운 '히카리 109호'는 9시48분 정각 도쿄역을 출발해 '사가미하라'에 이르렀을때 일본 국철 본사에 신칸센 열차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전화가 옵니다. 특수 장치를 적용한 이 폭탄은 속도가 80km 이하로 감속되면 자동으로 폭발하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범인은 삿포로 근교의 화물 열차를 폭파합니다.

 

 

 

 

이렇게 완벽한 폭파 계획은 불황으로 도산한 정밍기계공장의 전 경영자 '오키타 테츠오'외 2인의 기획으로 오키타는 국철 본사에 500만 달러를 요구합니다. 당국은 대책 본부를 구성하고 국철측이 오키타의 요구에 응하면서 범인은 500만 달러를 받기위해 약속 장소로 향하던 중 경찰차의 집요한 추척에 사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오키타는 수사본부의 허술한 수사를 교묘한 수법을 구사해 500만 달러를 손에 넣는데 성공하고 수사본부에 폭탄 제거발법을 적은 도면이 선플라자의 금전 등록기에 있음을 알리고 변장 후 가명을 사용해 해외 여행을 나가는 일원으로 위장해 하네다 공항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다방에 화재가 나면서 도면이 소실되어 버리고 수사본부는 TV를 통해 필사적으로 오키타에게 호소하지만 오키타는 아무런 반응이 없고 긴박한 수사본부에 제한 속도로 달리고 있는 '히카리 109호'를 밖에서 촬영한 필름이 전해지고 그 필름으로부터 폭탄 장치의 위치를 파악하게 됩니다.

 

 

 

 

수사본부는 폭탄 제거에 성공하고 하네다공항으로 이동한 오키타를 잡기위해 형사들이 데려온 아들 '켄이치'를 통해 오키타에게 자수하라고 호소하지만 오키타는 필사적으로 도주합니다.

 

 

 

신칸센 대폭파는 넷플릭스를 통해 리부트가 결정됐으며 '히구치 신지가' 감독, '쿠나사기 다케시'가 주연을 맡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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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뉴욕 포스트에 실렸던 피트 헤밀의 '고잉 홈(Going Home)을 바탕으로 '남자는 괴로워', '학교' 시리즈 등으로 유명한 일본 영화계의 거장 '야마다 요지(山田洋次, 1931~ )' 감독이 훗카이도를 배경으로 만든 감동적인 로드무비로 국민 배우인 '타카쿠라 켄(高倉健)'과 '바이쇼 치에코(倍賞千恵子)', '다케다 데쓰야(武田鉄矢)', '모모이 카오리(桃井かおり)' 등이 출연했습니다.

 

 

 

 

제1회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 작품상, 각본상, 최우수 남우 주연상 등 총 7개 부문을 석권했으며 제51회 키네마 준보 1위 등 주요 영화상을 휩쓸었으며 역대 일본 흥행 베스트10에 등재되었으며 개봉이후 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리메이크 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바이쇼 치에코(倍賞千恵子)'는 수많은 작품을 통해 일본 국민의 사랑을 받는 대배우로 '남자는 괴로' 시리즈에서 주인공 마쓰미 키요시의 여동생 '사쿠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행복의 노란 손수건'과 1981년작 '역(驛)'이 대표작으로 이 영화에서는 살인죄로 복역을 마치고 나온 남자인 '타카쿠라 켄'을 집 어귀에 노란 손수건을 걸어놓고 기다리는 아내역으로 출연했습니다.

 

 

 

 

- 제목 : 행복의 노란 손수건 (幸福の黄色いハンカチ)

- 개봉 일 : 1977년 10월 1일

- 감독 : 야마다 요지

 

- 출연

   - 시마 유사쿠 역 : 타카쿠라 켄

   - 시마 미츠에 역 : 바이쇼 치에코

   - 하나다 킨야 역 : 타케다 테츠야

   - 오가와 아케미 역 : 모모이 카오리

   - 와타나베 과장 역 : 아츠미 키요시

 

 

 

 

 

탄광 출신인 '유사쿠'는 모범수로 아바시리 감옥에서 6년의 형기를 마치고 나와 우체국에 들러 엽서를 써서 집으로 우편을 보냅니다. 마침 아바시리에 있던 '킨야'는 여자 친구와 헤어지게 되면서 일을 그만두고 '마츠다 파밀리아'를 사서 여성들을 꼬시는데 이때 도쿄에서 혼자 여행 온 '아케미'를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여행에 나섭니다. 

 

 

 

 

인근 해변으로 드라이브를 온 이 둘은 해변에 있던 '유사쿠'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이 셋은 함께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날 밤, 여관에서 '아케미'와 '킨야'는 한방을 쓰게 되고 '킨야'는 키스를 시도하고 '아케미'는 저항하며 울기 시작합니다. 이때 옆방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유사쿠'가 나와 이 둘의 소동은 끝나게 됩니다.

 

 

 

 

 

다음 날, 이 셋은 여행을 계속하지만 운전을 하던 '킨야'가 복통을 느껴 길거리에 주차를 하고 인근 주택으로 화장실을 찾아 가게되자 '아케미'는 다가오는 트랙터를 피하기 위해 운전을 했지만 운전미숙으로 인근 농지에 있던 건초더미 속으로 돌진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해당 농가에 하룻밤을 묵게 됩니다.

 

 

 

 

 

'유사쿠'는 아내 '미츠에'와 사우고 집을 나온 뒤 시비를 걸던 남자와 싸우게 되고 싸움에서 한명의 남자가 사망하게 되면서 자신이 감옥게 가게된 사연을 이야기합니다. 

 

 

 

 

체포된 후 감옥에 갇힌 '유사쿠'는 아내에게 '만약 나를 용서하고 받아준다면 우리 집 앞의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매어두시오,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리본이 없으면 그냥 떠나겠소'라고 엽서를 보냈다는 사연을 들은 일행은 '유사쿠'의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유바리까지 함께 가기로 하고 여행을 이어갑니다. 

 

 

 

 

지금도 유바리 지역에서는 이 영화가 매년 상영된다고 하며 로드무비다운 다양한 이야기와 '킨야'의 다소 코믹스러운 배역 때문에 눈물,콧물짜는 감동적인 면 보다 보고나면 그냥 행복해지는 영화라고 보시면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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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1902년 1월 '아오모리현'의 산악 지역에서 훈련 중이던 일본제국 육군의 중대 규모의 행군 부대가 혹한으로 조난당해 부대원 210명 중 199명이 동사한 사건을 영화화한 것으로 1971년 '닛타 지로( 新田 次郞)'에 의해 이 사건을 다룬 소설 '핫코다산 죽음의 방황(八甲田山死の彷徨)'을 원작으로

 

 

 

 

1977년 '일본침몰'로 유명한 '모리타니 시로'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키타오오지 킨야', '타카쿠라 켄', '미쿠니 렌타로', '탄바 테츠로' 등 당대 유명 배우들이 촐출동한 호화 캐스팅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작품은 극한 상태에서 조직과 인간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단기간에 배급 신기록을 기록했으며, 극 중 '기타오지 긴야'의 '하늘은 우리를 버렸다'라는 대사는 당시 큰 유행어가 되었으며

 

 

 

 

1977년 키네마 준보 베스트 4위에 선정됐고 개봉 다음해인 1978년에는 일본 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하며 그 당시까지의 역대 흥행 순위를 갈아치웠으며, '야쿠타가와 야스시(芥川也寸志)'가 음악을 맡아 제1회 일본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했습니다.

 

 

 
 

영화는 실제 사건과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 바뀌고 조난 상황의 상당 부분이 각색 되서 실제 사건과는 조금 다르며 210명 중 실제 생존자 11명도 2년 뒤 1904년 러일전쟁 때 전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핫코다산 사고 현장에는 사고 사실을 처음 알린 '고토 오장'의 동상이 세워졌고 참사 소식을 들은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가 '메이지 천황'에게 위문품으로 스키 2대를 보내줬는데 이게 일본 스키 역사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 제목 : 핫코다산 (八甲田山)

- 개봉 일 : 1977.06.18일

- 감독 : 모리타니 시로 (森谷司郎)

 

- 출연

   - 도쿠시마 대위 역 (徳島大尉) : 타카쿠라 켄 (高倉健)

   - 간다 대위 역 (神田大尉): 키타오오지 킨야 (北大路欣也)

   - 야마다 소령 역 (山田少佐): 미쿠니 렌타로 (三國連太郎)

   - 오가타 켄

  

 

 

 

1902년 일본은 러일전쟁을 앞두고 러시아의 영하 40도의 설원에서 원활한 작전을 할 수 있도록 동계 시범 훈련을 계획하고 1월에 8사단 5연대와 31연대를 아오미리현 핫코다산으로 설중 행군을 계획합니다. 

 

 

 

 

아오모리 5연대는 2대대 중심으로 1대대,3대대에서 차출한 인원을 포함 해 1개 중대 규모의 210명을 구성 해 '야마다' 소령, '간다' 대위의 지휘아래 아오모리에서 출발해 핫코다산으로 혹한기 행군을 실시합니다.

 

 

 

 

5연대는 부실한 준비와 31연대에 뒤쳐지면 안된다는 지휘관의 고집이 맞물려 4km 지점에서 2일만에 길을 잃고 우왕좌왕 하면서 한두명씩 동사를 하게되면서 어느순간 생존 인원은 50여명 밖에 남지않습니다. 

 

 

 

반면 히로사키 31연대 '도쿠시마' 대위는 소수 정예의 27명의 부대를 이끌고 지역 주민을 안내인의 도움을 받아 야간 숙영은 민가에서 하는 등 유능한 지휘관의 모습을 보여주며 1월27일 마침내 핫코다산에 도착하고 '간다' 대위를 비롯한 대원들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5연대의 생존자는 고작 11명, 199명은 추위에 전부 동사했고 살아남은 3명은 사지가 멀쩡 했으나 동상으로 손가락, 발가락 절단해야 했으며 나머지 8명은 동상으로 팔다리를 절단 하는 등의 피해를 입게되고 살아남은 '야마다' 소령은 나중에 권총 자살, 그외 생존자는 2년 후 러일전쟁에서 모두 전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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